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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 이야기」 "즈그들 복없응께 애비 일찍잃고 고생 많이 했제" 
 mansuknews | 06-01-02 13:35
 
내 나이 17살에 결혼했어. 옛날엔 다 그랬잖아. 그때 신랑은 19살이었어. 그란디 내가 29살에 혼자가 되어 분거야. 남편이 31살에 죽어 불었어.
그러니껜 남편은 인공난리(6.25 전쟁) 나기 전 핸가 6월6일 날 죽었거든. 갑자기 죽대. 이유가 없었어. 그전에 아팠던 것도 아니고. 일하고 나서 뭐 그렁저렁 몸살 난 줄 알았제. 이력 없이 죽었어. 그렇게 쉽게 가불드라고.
그땐 난 나이도 어리고 뭐 자식들 쪽박에 밥숟갈 주어 담듯이 넷이나 남겨놓고 가 버린께 뭐 정신도 없고, 눈물도 안 나오고, 멍 하드라구. 남편 죽을 때 큰딸이 9살이었고 밑으로 7살, 5살, 2살이었어.
남편은 죽고 어린 것들 댈꼬 농사를 짓는데, 잘 짓나? 못 짓지. 농사일 중 남자 일은 품 사서 하고, 여자 일은 품 바꿔서 하고. 그때 넘의 밭 댓 마지기하고, 논도 서너 마지기 하고 지어먹었는데, 아 시골선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데만 급급했지. 그란께 애기들 공부도 못 가르쳤어.



큰딸, 작은딸은 핵교도 못 다니고 집에서 일만 했어. 나 혼자 있은께. 시골서는 나무해서 땔라, 밭 매고, 논 매고, 논에 약하고 할 일이 많았어. 일하느라고 딸 둘은 핵교 갈 생각도 못했어. 큰딸, 작은딸은 가, 갸, 기역자도 몰라 나도 그렇고 말이여.
그란디 농사만 지어서는 그러고저러고 못 살겠더라구. 딸들이 크고 나서는 동생들 맡겨놓고 장사도 많이 다녔지. 옷 보따리 머리에 이고 장사도 하고, 목포에서 생선 띠어다가 장에서 팔아도 보고, 또 곡석(곡식)을 사서 팔기도 했어.
농사며 동생들이며 딸네들 둘한테 맡겨놓고 장사를 했으니 덕분에 딸들이 고생 작살나게 했어. 그렇게 고생 했어도 어떻게 즈네들이 집안 살림 뻔히 다 아는데. 즈그들 복 없고, 내 복 없응께 일찍 애비 잃고 고생했제. 그래도 지금은 시집가서 자식들 낳고 그럭저럭 산께 다행인 것도 같구.
딸들은 핵교도 못 갔지만 셋째인 아들은 고등핵교까진 갔어. 아들놈이 중핵교 나와 갖고 목포로 간다해서 보내 놓았더니 그것도 졸업도 지대로 못했어.

셋째애 하나 객지에 보내서
공부 시키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돈을 지대로 못 해준께. 아들놈도 내가 뒷바라지 못 해준께 그냥 올라 오라 항께, 보따리 싸 갖고 올라와 부러. 졸업도 못하고 말이여. 애 하나를 객지에 보내서 공부 시키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어떡케든지 가르쳐 볼라고 했는디 말이여. 못 당하겠더라구. 농사 조금 지어 갖고 어떻게 하겠어.
그란디 아들놈은 허엿펐어(헤펐어). 친구들 밖에 모르고 그냥 돈 쪼가리 주면 그 돈을 어떻게 쓸라고만 하잖아. 하긴 내가 귀엽게 키우긴 했어 외아들이라. 막내딸은 두 살때 애비 잃고 했지만 그것은 그래도 국민핵교라도 졸업했어. 큰 놈, 작은 놈, 딸네들 둘만 불쌍해 핵교도 못 댕기고 맨날 일만 시켜먹고 말이여.
그렇게 고생하면서 키워서 큰딸, 작은딸은 시골에서 시집보냈어. 그것도 우리 살림에 힘들었어. 그러곤 아들놈하고 막내가 객지로 나온께 나도 따라 나왔제. 농사 좀 짓다가 애기들이 다 나와 버리니깐 혼자 못 하것은께 말이여. 여기 올라와서는 즈그들이 다 짝 만나서 산께 그래도 좀 수월했지.
내가 애기들 따라서 인천 땅에 47살에 올라왔어. 처음엔 용현동으로 왔어. 만석동에는 우리 막내딸이 여기 대성 목재 댕겼거든. 그래서 내가 47살에 인천에 왔은께, 한 50살에 여기 만석동에 왔는가 몰라. 여기 와서 벌써 한 삼십 몇 년이나 되았네.
인천에 처음 올라 와서도 장사를 했어. 저 하인천에 깡이 있었잖아. 깡에 다라 갖고 댕기면서 생선 쪼깐 띠어서 노점에 나와서 팔고 했어. 그 일만 했제, 배운 거 없고 뭐 다른 거 할게 어딨어.
난 일제시대, 육이오 다 겪었어도 난 몰라.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아서 잘 몰라. 가에서 굿이나 봤지. 그런 거 보다 난 자식 키운 게 나에게는 제일 큰일이었어. 생각해 봐 농사 조금 지어갖고 거름 값 댈라, 품 삯 줄라, 먹고 살기도 진짜 힘들었어.




배금례 할머니는...



동아제분 뒤 만석동 22번지에 사는 배금례 할머니(85)는 전남 신안군에 있는 ‘지도’라는 섬이 고향이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때 죽어서, 자식 없는 집의 양딸로 들어갔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일가친척이나 형제들이 없다.
또한 한동네 살다가 17살 때 결혼한 남편도 부모들이 일찍 죽어서 외할머니 밑에서 컸다. 때문에 시가 쪽에도 일가친척이 없다.
“나는 독불장군 나 하나야. 시가고 친정이고 아무도 없어. 외로워, 여간 외로워.”
남편이 죽고 자식 네 명을 키우면서 기댈 수 있는 친척마저 없었던 것은 할머니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였다.
배 할머니의 외로움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커지고 있다. 인천에 올라와 30년을 살았던 동네가 어린이 공원 때문에 철거되면서 정들었던 이웃들과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을 보는 것도 할머니를 힘들게 한다.
“사는 게 고통스러, 고통스러. 얼른 가야 할건디 탈났어. 오래 살아 뭐 하겄어. 그래 넘들은 꺼떡하면 죽고 꺼떡하면 죽고 잘 가드만은 말이여.”
배금례 할머니는 나이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작고 약한 노인이다. 하지만 오로지 혼자서 자식 넷을 키우고, 지금도 환갑이 지난 자식들을 걱정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누구보다도 힘들고 치열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강인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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