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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 이야기」 “원폭 떨어진건 알았지만, 항복할 줄은 몰랐어” 
 mansuknews | 04-08-24 12:12
 
내가 일하던 인천조선 배공장에서 8월 6일 정오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걸 방송에서 들었지.
당시 사람들은 원자폭탄이라는 말은 잘 몰랐고 그저 위력이 센 폭탄이 떨어졌다고만 생각했지. 그때 일본사람들은 원자폭탄을 '신가다바꾸다이'(새로 나온 폭탄)이라고 불렀지.
뉴스를 들어도 우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나. 어리벙벙해서 동요하지도 않았고 그때까지도 공장안에는 일본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지. 자기네들 내부에서는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가 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질 때 이미 전세가 기운 걸 알았지. 하지만 폭탄이 떨어지고 모두들 침묵했어. 일본이 항복할거라는 소리는 안했지. 일본 놈들도 원체 센 폭탄이 떨어져서 놀랬지. 웬만해선 항복안 할 놈들이었는데 원자폭탄 맞고 항복한 거지.
15일 날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일본 천황의 특별방송을 듣고 해방이 된 걸 알았어. 바로 거리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기본이 좋아서 들떠 있었지. 그날 나는 동인천에 나갔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지.
16일에는 저녁에 화평동 중앙시장을 지나가는데 그날도 사람들이 나와서 웅성대고 있었지. 그리고 용동 싸리재를 지나 애관극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 자세히 보니 인천의 건달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는데, 머리 허연 영감이 이승만 박사가 배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온다며 마중 나가자고 했어.

사람들이 따라 가기에 나도 따라갔지. 그런데 예전 재판소 앞 사거리에 가니 별안간 일본헌병들이 말을 타고 오더라구. 헌병들은 사람들에게 해산하라고 하며 위협을 했지. 그리곤 말에서 내려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발로 차고 그랬지. 신포동 사거리 쪽에서는 헌병들이 칼을 들고 때리기도 했어.
헌병들이 칼을 들이대면서 뒤로 올라가라고 하는데 발이 안떨어지더라구. 간신히 재판소까지 밀리고 지금 자유공원 쪽으로 올라가 집으로 돌아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일본헌병이나 칼, 군인들에 질렸었던거 같아. 그 다음부터는 나가질 않았지.
해방이 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 사람들을 이북사람들이 때렸다는 소문이 들렸는데, 여기 사람들은 조용히 보내주었지. 일본 사람들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짐까지 날라주었지.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집을 밑에 일하던 사람들에게 주고 갔지. 가게니, 물건들도 다 주고 갔어.
해방이 되고 나니 일거리가 딱 떨어졌어.
당시 만석동에 있던 공장들은 군수품을 만들던 공장들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니 만들 것이 없었지. 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사람들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공장은 문을 닫았어.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다른 일을 찾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했지.
공장이 운영을 못하고 있을 적에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을 잡아놓고 먹고 살아야 되니 생활비를 내 놓으라고 한 경우도 있었지. 그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공장이 안 돌아가고 일손을 놓고 있으니 금방 많이 모였어. 모여서 잡아 놓은 일본 사람들을 밤낮주야로 감시하며 돈을 요구했지.
그렇게해서 일본 사람들이 돈을 주면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지. 어떤 사람은 800원도 받고, 1000원이나 1200원씩을 받기도 했지. 그때 돈 1200원이면 한 달 생활비정도 될거야.
해방 되고 나서 큰 공장이 멈추어서 대부분 일거리가 없었지만, 그때 지금 인천역 자리에 있었던 인천항에는 배가 많았지. 그래서 생선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았어. 그렇게 만석동은 그런대로 활력이 있었지.
한국 사람들은 해방전에는 뒤지게 고생했지. 남자들은 군인이나 징용에 끌려가고, 여자들은 나이 16, 17살이 되어도 시집을 안가고 있으면 위안부로 끌려갔지. 그렇게 끌려가 죽기도 했어. 온 가족이 일을 안 하면 살기 힘들었고 일을 안하고 빈둥대면 징용에 끌려갔지.
나도 해방전에 잠시 일을 안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징용이 나왔었어. 하지만 내가 기술자라 다행히 징용을 피할 수 있었지. 해방되고 나니 나는 자유의 몸의 되어 좋았어. 해방전에는 징용이 무서워서 편하게 놀 수도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래서 해방되고 나서 다른 일을 해보려고 석 달을 놀았어. 낮에 중앙시장에 가서 한 바퀴 돌며 쭉 둘러보기도 했어. 다른 장사를 해보려고. 돌아보니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장사라는 것이 엄두가 안 나더군.
그러다 하던 대장간 일이나 마저 하자고 해서 대장간을 차렸지. 지금 대한제분 있는 곳에서 동료 3명과 함께 대장간을 열었지. 조금 모아둔 돈이 있어 모루(달군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쇠덩이) 한 개, 함머 세 개, 망치 한 개, 집게 한 개를 사서 일을 시작했어. 다른 것들이야 다 만들면 되지. 그런 거 못하면 대장간을 차리지도 못해. 저기 저 모루가 그때 산 건데 지금은 구하지도 못해. 그때도 구하기 힘들었어.
일을 다시 시작하니 이것이 내 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예나 지금이나 배못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일이 많아서 대장간을 차린 뒤 계속 일만 했어. 그때 대장간은 6.25때 폭격으로 대한제분 창고가 타는 바람에 함께 타버렸어. 전쟁이 끝나고 지금 자리에 대장간을 다시 만들었으니 벌써 50년이 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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