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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 이야기」 "피난와 연탄공장에서 거적만 깔고 살았지" 
 mansuknews | 04-04-02 12:17
 
만석우체국에서 만석 1차 아파트로 가는 길(만해길)은 북성부두와 똥바다로 통하는 길로,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다.
일제시대에 만해길 주변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빈터가 많이 있었다.
박상규할아버지(82)는 "왜정 때에는 이 쪽으로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어. 지금 한라빌라자리에 일본사람이 사는 집이 한 채 있었고, 만석어린이집 뒤편으로 지금은 헐려버린 집들 자리에 간장통이나 술통 같은 통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지. 그쪽으로 한국사람들이 사는 집이 몇 채 있었을 게야" 하고 당시의 43번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지금의 정유소 자리에는 낮은 산이 있었는데 주변으로는 담장이 둘러져 있었고, 담장을 따라 벚나무가 빽빽히 심어져 있었다.

“왜정때는 이곳에 사람 거의 안살았지”

"그 때는 이 맘 때쯤이면 그 산 주변으로 사쿠라(벚꽃)가 어찌나 많이 피었던지 다른 사람들이 월미도로 사쿠라 구경 갈 때 만석동 사람들은 그 산에서 꽃놀이를 했어. 그렇게 사람들이 오르내리면서 길이 생기게 되었지."
박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만석동의 봄 풍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 때 지금의 만석 1차 아파트 건너편 게이트볼장 자리에는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50여 평 규모의 연탄공장이 있었다.
당시 공장에서 만드는 연탄은 지금의 연탄과는 달리 작은 조개탄 같은 모양의 탄이었는데 주로 난로에 불을 때는 용도로 사용했다. 공장에서 만든 연탄은 일본인들이 사용했는데 박씨 할아버지는 "그 때 한국사람들은 연탄을 줘도 땔 만한 기구(난로)도 없었고, 그 때 그 연탄이 얼마나 비쌌는지 살 수도 없었지"하고 말한다.
해방을 맞으면서 일본인들은 점차 본국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연탄공장도 비워 둔 채로 지내게 되었다.

피난 온 가족들이 거적으로 문을 만들어 달고 비와 바람만을 피해 지냈다.


만해길 주변이 크게 변화한 때는 한국전쟁을 치르고 난 뒤부터이다.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들은 43번지 일대의 빈 터에 판자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황해도에서 피난을 내려와 54년간 만석동 43번지에서 살아온 신정숙할머니(75)는 "그 때 판자집도 없어서 버려진 연탄공장에서 맨바닥에 거적만 깔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어. 그나마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하며 피난 온 초기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신할머니가 말하는 곡수골은 지금의 게이트볼장 자리에 있던 버려진 연탄공장을 말한다.
공장 안에는 탄을 만들던 폭 1m, 길이 2m가량의 가마터 같은 것 4칸이 벽과 지붕만 있었다. 각 칸에는 피난 온 가족들이 거적으로 문을 만들어 달고 비와 바람만을 피해 지냈다.
"연탄공장에 가보면 사람들이 죽 누워있었는데, 간신히 죽이라도 끓여먹고 나면 하는 일이 '이사냥'이라. 그 때는 이가 어찌나 많았는지 말도 못했어. 거기다가 크기는 얼마나 컸는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바짝 말라가는데 이들은 크기가 손가락 한마디 만큼씩은 했던 것 같애."
연탄공장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고 몇 년이 지난 뒤 전염병인 장티푸스가 돌았다.때문에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병치레를 하는 집들이 많이 있었고, 죽는 사람들도 생겼다.
신할머니는 "그 때 어느 집인가는 온 가족이 병치레를 하던 끝에 엄마만 죽은 집이 있었어. 그러니 애들이 어땠겠어. 때만 되면 빈 그릇을 들고 돌아다니는 거야. 어쩌겠어. 나 먹던 죽이라도 나눠 줄 수밖에" 하며 "그 때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제대로 묻을 수가 있었나? (게이트볼장 옆에 있는) 야산에 그냥 묻은 게지"하고 말했다.
1.4 후퇴 이후로 만석동으로 피난오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당시 43번지 일대에는 지금의 송월변전소 자리까지 판자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더 이상 집을 지을 만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변의 야산을 깎고 움막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신할머니는 "그 때 저 산(만석1차 아파트 건너편 야산)이 꽤 크고 높았어. 그 밑으로 사람들이 움막을 지었는데, 땅을 파서 옆으로 벽돌을 몇 장 쌓아올리고 지붕으로 루핑을 덮었어. 움막을 드나드는 게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지. 드나들려면 기어다녀야 했으니까"하고 움막이야기를 했다.
당시 움막을 짓던 자리는 연탄공장에서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들을 묻었던 자리 근처였기 때문에 산을 깎던 도중 시체가 나와 이장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피난민들 정착하면서 움막 사라져

피난민들이 만석동에 정착하여 부두나 갯가에서 일을 시작하고 생활이 자리를 잡으면서 움막은 조금씩 고쳐져서 서서히 지금의 집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40여 년 동안 생활해왔다.
하지만 현재 43번지에서는 신할머니가 이야기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만석 1차, 3차 아파트가 생기고, 만석신고가도로가 만들어지면서부터 43번지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손수 지은 판자집들이 철거되어 한 동네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살아온 집터에는 어린이공원이 들어서 있다.
신할머니는 "내가 피난와서 만석동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여길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애. 난 여기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제는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구만"하며 "그 전보다 좋은 세상이기는 한 것 같은데 살기는 더 힘들어진 것 같다"며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냈던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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